6.25 전쟁
- 시기
- 1950년 6월 – 1953년 7월
- 진영
- 북한·중국 vs 대한민국·유엔군
- 전투
- 61
6.25 전쟁(六二五戰爭) 또는 한국 전쟁(문화어: 조선 전쟁, 조국해방전쟁, 영어: Korean War, 중국어 정체: 韓國戰爭/朝鮮戰爭, 중국어 간체: 韩国战争/朝鲜战争, 러시아어: Корейская война)은 1950년 6월 25일에 조선인민군이 '폭풍 작전' 계획에 따라 삼팔선 전역에 걸쳐 기습적으로 대한민국을 침공하면서(남침) 발발한 전쟁이다.
출처: 위키백과 — 6.25 전쟁 · CC BY-SA 4.0
전투 61
1950년 6월
대한해협 해전
대한해협 해전(大韓海峽海戰)은 6.25 전쟁 첫날인 1950년 6월 25일부터 26일까지 대한민국 해군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해군 사이에 벌어진 단함 전투이다. 수백 명의 병력을 태운 북한의 군용 수송선이 부산광역시 인근에 상륙을 시도하려던 중 대한민국의 초계함에 발각되어 침몰되었다. 이 전투는 6.25 전쟁의 첫 해상 전투 중 하나였으며 대한민국 해군의 승리로 이어졌다.
1950년 6월
춘천 전투
춘천 전투(春川戰鬪, 영어: Battle of Chuncheon)는 한국 전쟁 초기 1950년 6월 25일~ 6월 30일까지 춘천, 홍천 일대에서 대한민국 국군과 조선 인민군이 벌인 전투이다. 결과적으로 북한군이 춘천 점령에 성공했으나 대한민국 국군의 강한 저항으로 인해 지연전으로 이어지면서 전략적으로는 남침 계획에 상당한 차질이 생겼다.
1950년 6월
옹진반도 전투
옹진반도 전투(甕津半島戰鬪)는 1950년 한국 전쟁 당시 독립 제17연대(연대장 대령 백인엽)가 전차 1개 중대로 증강된 조선인민군 제 6사단 14연대와 38경비 제 3여단과 맞서 치른 방어전투이다.
1950년 7월
오산 전투
오산 전투(烏山戰鬪, Battle of Osan) 또는 죽미령 전투(竹美嶺戰鬪)는 1950년 7월 5일 6.25 전쟁 당시 미군과 북한군과의 최초의 교전으로 북한군이 서울을 함락시키고 제2차 공세를 개시함에 따라 한국 전선에 적극 개입시키기로 한 미 행정부의 조치와 더불어 그 지상군 선발대가 최초로 출동하여 싸운 전투이다.
1950년 7월
대전 전투
대전 전투(大田戰鬪)는 1950년 7월 16일 야간에 미 제24보병사단 제34연대가 갑천 일대에 배치되면서부터 7월 20일까지(본격적인 전투는 19일에 시작되어 대전 시가전은 20일) 대전 일대에서 미 제24보병사단이 조선인민군 제3, 4사단 및 105 전차사단에 대응해 펼친 지연전이다.
1950년 7월
평택 전투
평택 전투 혹은 '평택-안성 방어선 전투'는 한국 전쟁 중기 미국 스미스 부대가 오산 전투의 서전에서 패한 뒤로, 윌리엄 F. 딘(William F. Dean) 소장이 이끄는 미 제 24보병사단의 제34연대 1대대가 평택 그리고 3대대가 안성 부근에 방어선을 구축하였는데 제34연대 1대대가 평택에서 전투를 벌이며 지연전을 펼쳤지만 안성에 전개했던 3대대는 전투없이 천안으로 철수하였단.
1950년 7월
천안 전투
천안 전투는 한국 전쟁 초기 천안에서 치러진 전투로, 미국의 스미스 부대가 오산 전투의 서전에서 패한 뒤로 윌리엄 F. 딘 소장이 이끄는 미 제24사단의 주력이 축차 투입되어 경부 국도상에서 벌이는 지연전을 취급하였다.
1950년 7월
전의-조치원 전투
전의-조치원는 한국 전쟁 중기 전의군과 조치원에서 치러진 전투로 미국의 스미스 부대가 오산 전투의 서전에서 패한 뒤로 윌리엄 F. 딘 소장이 이끄는 미 제24사단의 주력이 축차 투입되어 경부 국도상에서 벌인 지연전이다. 전의 지구 전투는 전의면과 전동면 사이의 개미고개 일대를 중심으로 벌어져‘개미고개 전투'라고도 부른다.
1950년 7월
영동 전투
영동 전투는 한국 전쟁 초기인 1950년 7월 22일에서 25일까지 남한의 충청북도 영동군에서 미군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이 일어났던 교전이다. 한반도로 상륙한 미군의 제1기병사단은 대전 전투 이후 미군 제24보병사단을 엄호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하지만 제1기병사단 병력은 전투를 하지 않았으며 조선인민군 소속 제3사단은 미군을 제압한 후 후퇴시켰다.
1950년 7월
상주 전투 (1950년)
상주 전투는 6.25 전쟁 초반인 1950년 7월 20일부터 31일까지 대한민국 남부의 상주시에서 유엔과 조선인민군 간에 벌어진 교전이다. 이 전투는 조선인민군이 미국과 대한민국 국군을 지역 밖으로 밀어내어 조선인민군의 승리로 끝났다.
1950년 7월
하동 전투
하동 전투는 한국 전쟁 초기 진주 전투와 함께 채병덕이 이끄는 영남 지구 편성 관구 사령부가 미 제24사단의 일부 병력과 협동하여, 호남의 남안선을 거쳐 하동을 우회 침공하는 북한군 제6사단을 요격하여, 진주를 잃기까지의 7일간의 지연전을 일컫는다.
1950년 8월 – 1950년 9월
낙동강 방어선 전투
낙동강 방어선 전투(洛東江 防禦線 戰鬪, 영어: Battle of the Pusan Perimeter)는 국군과 유엔군, 북한군 사이에 벌어진 치열한 전투로 1950년 8월 4일부터 같은 해 9월 18일까지 벌어졌다. 이 전투은 6.25 전쟁 사상 중요한 전투 중 하나였다. 한국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 투입된 유엔군 병력 140,000명이 북한군 98,000명의 마지막 침공을 막기 위해 노력했다. 국군과 유엔군은 북한군의 지속적인 공세에 계속 후퇴하면서 낙동강 방어선까지 물러났는데, 이 방어선은 한반도 남쪽에 구축된 140km의 방어선이었다. 미군 주도의 유엔군은 병력의 손실을 최소화하며 북한군의 공격을 6주 동안 막아냈다. 주요 전투는 대구, 마산, 포항, 낙동강 일대에서 벌어졌다.
1950년 8월 – 1950년 9월
남강 전투
남강 전투는 6.25 전쟁 초기에 대한민국 남강과 낙동강 부근에서 유엔군사령부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군이 1950년 8월 31일부터 9월 19일까지 벌인 전투이다. 이 전투는 낙동강 방어선 전투의 일부였으며, 동시에 여러 차례 치러진 대규모 전투 중 하나였다. 이 전투는 미국 육군이 강을 건너는 조선인민군의 공격을 격퇴한 후 유엔의 승리로 끝났다.
1950년 8월
제1차 낙동강 돌출부 전투
제1차 낙동강 돌출부 전투는 6.25 전쟁 초기인 1950년 8월 5일부터 19일까지 유엔군사령부(UN)와 조선인민군(KPA)이 영산(창녕군 영산)과 낙동강 일대에서 벌어진 교전을 일컫는 말이다. 낙동강 방어선에서 이루어진 전투 중 하나이며, 동시에 벌어진 여러 대규모 전투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 전투는 미군에서 온 증원군이 북한의 사단을 파괴하면서 UN의 승리로 끝났다.
1950년 8월 – 1950년 9월
안강-기계 전투
안강-기계 전투는 또는 경주 전투는 미국 주도의 유엔군과 조선인민군이 6.25 전쟁 초인 1950년 8월 31일부터 1950년 9월 15일까지 경주시를 두고 싸운 전투이다. 이 전투는 넓은 의미에서 낙동강 방어선 전투의 일부였으며, 다부동 전투를 비롯한 같은 시기의 전투만큼 규모가 컸다. 유엔군은 이 전투에서 북한군의 공격을 몇 번이고 격퇴한 끝에 승리를 거두었다.
1950년 8월
포항 전투
포항 전투는 한국 전쟁 초기에 유엔군과 북한군 사이에 벌어진 교전으로, 1950년 8월 5일부터 20일까지 대한민국 포항시 주변에서 전투가 계속되었다. 이 전투는 낙동강 방어선 전투의 일부이자 동시에 여러 대규모 교전 중 하나였다. 이 전투는 유엔군이 북한의 조선인민군 3개 사단의 산악 동해안 공격 시도를 격퇴한 후 유엔군의 승리로 끝났다.
1950년 8월 – 1950년 9월
마산 전투
마산 전투는 6.25 전쟁 초기인 1950년 8월 5일부터 9월 19일까지 유엔군사령부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군 사이에서 벌어진 교전으로, 대한민국 남동부의 마산시와 낙동강 인근에서 일어났다. 이 전투는 낙동강 방어선 전투의 일부이며, 여러 대규모 교전 중 하나로 동시에 진행되었다. 한 달이 넘게 지속되었던 이 전투는 많은 수의 미국 육군(US) 병력이 조선인민군(KPA) 2개 사단의 계속되는 공격을 격퇴하면서 유엔군의 승리로 끝났다.
1950년 8월
볼링장 전투
볼링장 전투(1950년 8월 21일)에서 유엔군사령부(UN) 병력은 6.25 전쟁 초기에 대한민국 대구광역시 인근에서 북한군을 격파했다. 이 전투는 대구 북쪽의 "볼링장"이라 불리는 좁은 계곡에서 벌어졌다. 이 전투는 조선인민군(KPA) 제13사단과 대한민국 육군(ROK) 제1사단이 도시 북쪽 언덕에 있는 마지막 방어선에서 일주일간 전투를 벌인 후 발생했다. 미국 육군 제27보병연대와 제23보병연대를 포함한 증원군이 대한민국 국군의 방어력을 강화하기 위해 투입되었다. 이 전투와 다른 몇몇 전투는 낙동강 방어선 전투의 작은 교전들이었다.
1950년 8월
대구 전투
대구 전투(大邱戰鬪)는 6.25 전쟁 초기 유엔사령부(UNC)와 조선인민군(KPA)의 교전으로, 1950년 8월 5일부터 8월 20일까지 대한민국 대구시 일대에서 전투가 계속되었다. 이 전투는 낙동강 방어선 전투의 일부이자 낙동강 공세 당시 주요 전투들 중 하나였다. 이 전투는 낙동강을 건너 대구를 공격하려는 조선인민군의 시도를 저지하면서 유엔의 승리로 끝났다.
1950년 8월
다부동 전투
다부동 전투(多富洞戰鬪, Battle of Tabu-dong)는 1950년 6.25 전쟁 당시 가장 치열했던 전투로 꼽히는 전투로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에서 전투를 벌인 끝에 대한민국 국군이 북한군의 대공세를 저지시키고 대구로 진출하려던 북한군의 의지를 꺾었다.
1950년 8월 – 1950년 9월
함안 전투
함안 전투는 6.25 전쟁 초기 유엔군과 조선인민군 사이에서 벌어진 낙동강 방어선 전투의 일부로, 1950년 8월 31일부터 9월 19일까지 대한민국 함안군 인근에서 벌어진 교전이다. 이 전투는 함안 마을을 공격한 조선인민군(KPA)의 강력한 공격을 미국 육군과 대한민국 육군 병력이 대거 격퇴하면서 유엔군의 승리로 끝났다. 국 마산 전투 중 마산 방어를 맡은 미국 제24보병연대는 함안 서쪽의 능선에 따라 길게 배치되어 있었다. 조선인민군 제6사단이 함안 마을을 공격하자 미군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1주일간의 전투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미 24보병연대는 부진한 전투력을 보였으며, 추가 미군 병력이 투입되어 공격을 막는 데 기여했다. 조선인민군은 1950년 9월 15일 인천 상륙 작전이 시작되자 이를 막기 위해 부대를 차출했고, 1950년 9월 19일 조선인민군이 함안에서 철수하면서 함안 전투도 끝났다.
1950년 8월 – 1950년 9월
전투산 전투
전투는 6.25 전쟁 초기에 유엔군사령부(UN)와 조선인민군 간에 1950년 8월 15일부터 9월 19일까지 대한민국의 서북산 산악 지역일대에서 벌어진 교전이다. 이 전투는 낙동강 방어선 전투 동안 동시에 벌어진 여러 대규모 교전 중 하나였다. 이 전투는 많은 미국 육군(미군)과 대한민국 육군(국군) 병력이 조선인민군(KPA) 사단이 산악 지역을 점령하는 것을 막아 유엔의 승리로 끝났다.
1950년 9월
인천 상륙 작전
인천 상륙 작전(仁川上陸作戰, 영어: Battle of Incheon/Inchon)은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9월 15일 유엔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의 주도로 한반도에서 진행된 상륙 작전으로 이 작전에는 75,000여 명의 병력과 261척의 해군 함정이 투입된것에 더불어 나아가 인천이 수복된 후 유엔군은 13일에 걸쳐 서울로 진격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작전 암호명 크로마이트 작전이다.
1950년 9월
제2차 낙동강 돌출부 전투
제2차 낙동강 돌출부 전투(Second Battle of Naktong Bulge)는 6.25 전쟁 당시 1950년 9월 1일부터 9월 15일까지 대한민국의 낙동강을 따라 유엔군사령부와 조선인민군 간에 벌어진 전투이다. 낙동강 방어선 전투의 일부이며, 9월 조선인민군이 펼친 대공세 중 벌어진 여러 대규모 전투 중 하나였다. 미국 육군 병력이 조선인민군의 강력한 공격을 격퇴하면서 유엔군의 승리로 끝났다.
1950년 9월
가산 전투
가산 전투(한국 한자: 架山 戰鬪)는 1950년 9월 1일부터 9월 15일까지 대한민국 가산 인근에서 일어난 한국전쟁 초기 유엔군과 조선인민군 사이의 교전이다. 이 전투는 부산 교두보 전투의 일부이며, 다른 전투들과 동시에 일어난 여러 대규모 교전 중 하나이다. 전투는 다수의 미군과 대한민국 육군이 조선인민군의 공격을 방어한 뒤 반격하여 유엔군의 승리로 끝났다.
1950년 9월
영산 전투
영산 전투는 6.25 전쟁 초기에 1950년 9월 1일부터 5일까지 대한민국 창녕군 영산에서 유엔군과 조선인민군 사이에 벌어진 교전이다. 이 전투는 낙동강 방어선 전투의 일부였으며, 동시에 벌어진 여러 대규모 교전 중 하나였다. 이 전투는 많은 수의 미군이 강력한 조선인민군의 공격을 격퇴한 후 유엔군의 승리로 끝났다.
1950년 9월
낙동강 대공세
낙동강 대공세(한국 한자: 洛東江大攻勢, 영어: Great Nakdong Offensive)는 6.25 전쟁 당시 1950년 9월 1일부터 9월 15일까지 이어진 북한군의 공세로 대한민국과 유엔에 대한 공격이었다. 조선인민군이 유엔군사령부가 구축한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한 마지막 공격이었지만 이는 실패로 끝났다.
1950년 10월
온정리 전투
온정리 전투(溫井里戰鬪)는 한국 전쟁 중기 북한 동부전선에서 국군의 제일 선봉으로 진격하던 김종오 준장이 이끄는 제6사단이 한중 국경선까지 밀고 올라갔다가 비밀리에 압록강을 건넌 중공군에 패한 전투이자, 한국전쟁에서 대한민국 국군이 중공군과 첫 번째로 치른 전투이다.
1950년 10월 – 1950년 11월
운산 전투
운산 전투(雲山 戰鬪)는 한국 전쟁 중기 북한 동부 전선에서 진격을 계속하여 한만 국경선을 눈앞에 둔 국군은 운산-영변 지역에서 중공군과 벌인 접전이다. 중공군의 세력을 과소 평가한 국군은 물자 부족과 열악한 조건 속에 진격을 감행함으로써 중공군에 의해 포위당하는 형세에 몰리게 되었으며, 많은 손실과 함께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50년 10월
평양 전투 (1950년)
평양 전투는 6.25 전쟁 당시 1950년 10월 17일 ~ 10월 19일 대한민국 국군과 국제연합군으로 참전한 미군 연합군이 조선인민군을 물리치고 당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대 도시였던 평양을 탈환한 전투이다.
1950년 10월
Battle of Yongyu
The Battle of Yongyu, also known as the Battle of the Apple Orchard or the Battle of Yongju by the Australians who fought in it, took place between 21 and 22 October 1950 during the United Nations Command (UNC) offensive into North Korea against the Korean People's Army (KPA) that had invaded South Korea during the Korean War. The battle was fought between the 3rd Battalion, Royal Australian Regiment of the 27th British Commonwealth Brigade and the KPA 239th Regiment.
1950년 10월
사리원 전투
사리원 전투는 1950년 10월 17일 유엔군이 대한민국을 침공한 조선인민군에 대항해 반격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조선인민군 사상자는 215명 사망과 3700명 이상의 생포자를 포함했으며, 유엔군 측은 1명 사망과 3명 부상자가 발생했다.
1950년 11월 – 1950년 12월
장진호 전투
장진호 전투(長津湖戰鬪), 또는 장진 저수지 전역, 장진 저수지 전투는 6.25전쟁의 결정적 전투 중 하나로 미국 해병대 제1해병사단이 주축이 된 유엔군과 중국인민지원군이 장진호 및 장진군 일대에서 벌인 전투이다. 미국을 비롯한 서구 각국은 이 전투의 지명을 장진이 아닌 "초신"(chosin)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장진(長津)의 일본어 발음에 의한 것이다. 유엔군은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인 1945년, 일본어로 작성된 지도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장진이라는 지명도 이런 방식으로 발음하게 되었다. 중국이 한국 전쟁에 참여한 이후, 중국인민지원군 제9병단이 북한 북동쪽으로 침투했다.
1950년 11월 – 1950년 12월
청천강 전투
청천강 전투(중국어 간체자: 清川江战役, 병음: Qīngchuānjiāng Zhànyì)는 6.25 전쟁의 주요 전투 중 하나로 1950년 11월 25일부터 12월 2일까지 청천강 일대에서 발생한 전투이다. 유엔군의 공세에 맞서 중국인민지원군이 성공적인 반격을 감행한 이후, 더글러스 맥아더는 크리스마스 공세를 개시해 중국군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전쟁을 끝내고자 했다. 이러한 전략을 예상한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는 반격을 계획하여 제2차 전역을 준비했다.
1950년 11월
군우리 전투
군우리 전투(한자: 軍隅里戰鬪) 또는 와원 전투(중국어 간체자: 瓦院战斗, 병음: Wǎ Yuàn Zhàn Dòu)는 1950년 11월 27일부터 29일까지 오늘날 와원 인근에서 벌어진 6.25 전쟁의 주요 전투 중 하나이다. 청천강 전투에서 미국 제8군의 우측 부대가 궤멸한 이후, 중국인민지원군의 제38군은 중요한 요충지인 군우리로 빠르게 진격하여 유엔군의 철수로를 차단하려고 했다. 이 전투는 튀르키예 독립 전쟁 이후 튀르키예군이 처음으로 벌인 전투이기도 했는데, 터키 여단은 중국인민지원군을 와원에서 지연시키려고 했다. 튀르키예 여단은 수적으로 우세한 중국군에게 포위되어 전투가 어려웠지만, 그들은 중국군의 포위를 돌파하여 미국 제2보병사단과 다시 합류할 수 있었다. 튀르키예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인해 중국인민지원군의 공격이 지연되면서 다른 유엔군 부대는 큰 피해를 입지 않은 채 철수할 수 있었고, 이후 12월에 재집결할 수 있었다.
1950년 11월
박천 전투
박천 전투 는 6.25 전쟁에 중국인민지원군 (PVA)이 참전한 후 중국군의 제1단계 공세가 시작된 지 10일 후에 발발했다. 보촨 전투(중국어 간체자: 博川战斗, 병음: Bó Chuān Zhàn Dòu)라고도 알려진 이 전투는 전쟁 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한민국 침공에 대한 개입 이후 유엔군사령부의 압록강 공세를 패퇴시켰다. 이 전투는 영국 및 오스트레일리아군과 미군 전차 및 포병이 지원하는 제27보병여단과 제39군 예하의 제117사단 중국인민지원군이 대령강변의 박천군 마을 일대에서 벌였다. 10월 30일 정주를 점령한 후 영국과 오스트레일리아군은 미 제8군의 서쪽 측면을 강화하기 위해 박천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한편, 운산 전투에서 미군에 대한 승리 직후, 중국인민지원군 제117사단은 예상치 못한 중국인민지원군의 공격에 직면하여 철수하는 유엔군을 차단할 목적으로 남쪽으로 공격해 왔다. 중국인민지원군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 제27영연방여단은 우측 상류에 있는 미 제24보병사단과 협력하여 후방 부대로서 대령강과 청천강의 하류 도하 지점을 방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1950년 12월 – 1951년 1월
1·4 후퇴
1·4 후퇴(한국 한자: 1·4後退), 제3차 서울 전투(영어: Third Battle of Seoul), 서부 전선 제3차 공세(중국어 간체자: 第三次战役西线, 병음: Dì Sān Cì Zhàn Yì Xī Xiàn) 또는 중국 신년 공세(영어: Chinese New Year's Offensive)는 6.25 전쟁 중인 1950년 12월 경부터 이듬해인 1951년 1월 초 사이, 중국인민지원군의 공세로 유엔군의 주력이 서울에서 물러나고 공산군이 서울을 재점령한 사건을 가리킨다.
1950년 12월 – 1951년 1월
제1·2차 원주 전투
제1·2차 원주 전투(프랑스어: Bataille de Wonju, 영어: First and Second Battle of Wonju), 또는 원주 전역이나 동부 전선 제3차 공세 는 북한과 유엔 사령부가 6.25 전쟁 동안 벌인 일련의 전투 중 하나이다. 1950년 12월 31일부터 1951년 1월 20일까지 원주시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서부 전선에서 중공군이 서울을 점령한 것과 발맞추어 조선인민군은 중부 및 동부 전선에서 유엔군 방어진지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원주를 점령하려고 시도했다.
1951년 2월
지평리 전투
지평리 전투(砥平里戰鬪)는 1951년 2월 13일부터 2월 16일까지 경기도 양평군 지평면 지평리 일대에서 원형 방어진지를 구축한 미국 제2보병사단 제23연대에 배속된 프랑스 대대가 제39군과 3일간 벌인 격전이었다. 3일 동안 완전히 포위된 미군 23RCT와 프랑스 대대는 포위 3일째인 2월 16일에 미국 제1기병사단 제5기병연대 3대대를 주축으로 편성된 크롬베즈 특별임무부대에 의해 구출되었고, 중국군은 큰 피해를 입고 철수했다.
1951년 2월
Battle of the Twin Tunnels
The Battle of the Twin Tunnels took place during the Korean War. In which the UN forces inflicted heavy casualties on the People's Volunteer Army (PVA). The "Twin Tunnels" refer to a series of railroad tunnels along the Central Line in eastern Jije-myeon, Yangpyeong County, Gyeonggi Province, South Korea.
1951년 2월
선더볼트 작전
선더볼트 작전(영어: Operation Thunderbolt)은 1951년 중국인민지원군 및 조선인민군의 대공세에 맞서 울프하운드 작전 이후 매슈 리지웨이 장군이 실행한 유엔군의 반격 작전이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이 전투를 한강 남안방어전(중국어: 漢江南岸防禦戰)이라고 부른다.
1951년 2월
횡성 전투
횡성 전투는 1951년 2월 중공군의 제4차 공세 때 횡성군에서 전개된 전투이다.
1951년 2월 – 1953년 7월
원산항 봉쇄
원산 봉쇄 또는 원산 포위전은 1951년 2월 16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6.25 전쟁 동안 진행되었으며, 861일간 지속된 현대 역사상 가장 긴 해상 봉쇄였다. 주로 미국의 유엔 해군이 전략적 요충지인 원산시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해군이 사용하는 것을 막았다.
1951년 3월 – 1951년 4월
Operation Ripper
Operation Ripper, also known as the Fourth Battle of Seoul, was a United Nations (UN) military operation conceived by the US Eighth Army, General Matthew Ridgway, during the Korean War. The operation was intended to destroy as much as possible of the Chinese People's Volunteer Army (PVA) and Korean People's Army (KPA) forces around Seoul and the towns of Hongch'on, 50 miles (80 km) east of Seoul, and Chuncheon, 15 miles (24 km) further north. The operation also aimed to bring UN troops to the 38th Parallel. It followed upon the heels of Operation Killer, an eight-day UN offensive that concluded February 28, to push PVA/KPA forces north of the Han River. The operation was launched on 6 March 1951 with US I Corps and IX Corps on the west near Seoul and Hoengsong and US X Corps and Republic of Korea Army (ROKA) III Corps in the east, to reach the Idaho Line, an arc with its apex just south of the 38th Parallel in South Korea.
1951년 4월
가평 전투
가평 전투(Battle of Kapyong, 중국어 간체자: 加平战斗, 병음: Jiā Píng Zhàn Dòu)는 1951년 4월 22일부터 25일까지 미8군 제9군단 27영연방여단에 배속된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뉴질랜드, 영국군 그리고 추가 지원된 미군 여러 부대가 중국인민지원군과 가평에서 맞붙은 전투이다. 전투는 중공군 춘계공세 때 발생했으며, 제27보병여단은 남쪽의 서울로 이어지는 주요 도로 중 하나인 가평 일대에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오스트레일리아 왕립 연대 제3대대와 프린세스 패트리샤 캐나다 경보병연대 제2대대가 전방대대의 임무를 맡았으며 뉴질랜드 제16포병연대, 그리고 미국 제213야전포병대대, 제2화학박격포대대 A+B중대와 72전차대대 A중대 셔먼 전차 15대 그리고 74전투공병대대들이 이들을 지원했다. 사창리 전투에서 패배한 대한민국 제6사단 병사들이 협곡을 통해 철수하자 중국인민지원군은 여단의 방어지역으로 침투해 504고지에 위치한 오스트레일리아군을 공격했고, 전투는 다음날까지 이어졌다.
1951년 4월
설마리 전투
설마리 전투 또는 임진강 전투(Battle of the Imjin River), 글로스터 고지 전투(Battle of Gloster Hill)는 한국 전쟁 중, 1951년 4월 22일부터 4월 25일 사이에 파주시 적성면 감악산 부근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중국 인민해방군은 임진강 하류의 유엔군 진지를 공격하였는데, 이는 1951년 3월 수복된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을 다시 점령하기 위한 것이었다.
1951년 4월 – 1951년 5월
중공군 춘계공세
중공군 춘계공세 또는 중공군 제5차 공세는 6.25 전쟁 당시 중국인민지원군이 수행한 군사 작전이다. 작전을 위해 70만 명으로 합산된 3개 야전군을 기동한 중공군 사령부는 1950년 11월부터 12월까지 수행한 제2차 공세 이래로 가장 규모가 큰 공세 작전을 수행했다. 작전은 1951년 여름부터 시작되었고 한반도에서 영원히 유엔군을 몰아내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1951년 4월
율동 전투
율동 전투(栗洞戰鬪)는 6.25 전쟁 당시 필리핀군과 중국인민지원군이 연천군 북방에서 4월 22일부터 4월 23일까지 벌인 전투였다. 중공군 춘계공세의 일부로써 중국 제44사단은 미국 제3보병사단 휘하의 제65보병여단을 4월 22일 밤 연천 인근에서 공격했다. 필리핀 제10대대 전투단은 제65보병여단의 일부로써, 오후 10시경에 율동리 일대에 포위되었다. 제10대대 전투단은 주변 부대와 연락이 끊겼음에도 불구하고 4월 23일까지 중공군의 공세를 막아내는데 성공했다. 제10대대 전투단의 활약으로 미국 제3보병사단은 연천에서 성공적으로 철수할 수 있었다.
1951년 8월 – 1951년 9월
피의 능선 전투
피의 능선 전투(영어: Battle of Bloody Ridge)는 1951년 8월 16일부터 9월 5일까지 강원도에서 벌어진 전투로 한국 전쟁의 일부이다. "피의 능선"이란 명칭의 유래는 많은 사상자가 발생해 능선이 피로 넘쳐 흘러 종군기자들이 이 능선을 피의 능선이란 이름으로 보도하면서 붙여졌다.
1951년 9월 – 1951년 10월
단장의 능선 전투
단장의 능선 전투(斷腸의 稜線 戰鬪, 영어: Battle of Heartbreak Ridge, 1951년 9월 13일 ~ 10월 13일)는 미국 2 보병 사단과 프랑스 대대 및 네덜란드 판 회츠 연대가 중동부 전선의 주저항선을 강화할 목적으로 894고지, 931고지, 851고지에 배치된 조선인민군 제6, 12사단을 공격하여 점령한 공격 전투다.
1951년 10월
제1차 마량산 전투
제1차 마량산 전투(영어: Battle of Maryang-san) 혹은 마량산 방어전(중국어 간체자: 马良山防御战, 병음: Mǎliáng Shān Fángyù Zhàn)은 1951년 10월 3일부터 10월 8일까지 유엔군 소속의 오스트레일리아군 및 영국군과 중국인민지원군이 한국 전쟁 기간 중 마량산(315고지, 317고지로도 불리움)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1951년 12월
순천 항공전
순천 항공전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순천 인근 공중에서 1951년 12월 1일 발발한 6.25 전쟁의 공중전이다. 왕립 오스트레일리아 공군 제77비행대의 글로스터 미티어 14대가 소련 제176방위전투항공여단에서 출격한 20대의 MiG-15에 의해 공격받은 전투이다. 미그기는 중공군의 공군을 지원하고 있었지만 소련은 공식적인 6.25 전쟁의 참전 국가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 공중전 이후 유엔군은 자신들의 전투기가 소련군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에 F-86 세이버를 추가로 한반도에 배치했다.
1952년 6월 – 1953년 3월
불모고지 전투
불모고지 전투(영어: Battle of Old Baldy 배틀 오브 올드 볼디[*])는 1952년 6월 26일부터 1953년 3월 26일까지 경기도의 연천군의 불모고지 지역에서 벌어진 미군, 콜롬비아군, 국군, 그리고 중공군 사이의 5차례의 전투를 의미한다.
1952년 6월
수풍댐 폭격
수풍댐 폭격은 1952년 6월 23일부터 6월 24일까지, 그리고 6월 26일부터 6월 27일까지 진행된 유엔 사령부 소속 공군이 한국 전쟁 중에 감행한 폭격전이다. 북한의 수풍댐을 주요 목표로 삼은 이 공격은 판문점에서 진행 중이던 협상이 진전을 보이지 않자 정치적으로 압박을 가하기 위해 감행되었다.
1952년 10월 – 1952년 11월
삼각고지 전투
삼각고지 전투(三角高地戰鬪) 또는 철의 삼각지대 전투(鐵─三角地帶戰鬪)는 김화읍 근처 삼각고지에서 벌어진 유엔군과 중공군 사이의 전투이다. 이 전투는 철원·김화를 저변으로, 평강을 정점으로 한 통칭 철의 삼각지대에서 벌어진 전투들을 총칭한다. 철의 삼각지대는 신고산∼평강으로 이어진 추가령지구대를 통과하는 경원선과 5번 국도가 여러 곳으로 연결되는 중요한 교통의 중심지였다. 당시에는 공산군측이 나진, 성진, 원산항에 양륙된 군수물자와 각지에서 동원한 병력을 이 지대에 집결시킨 뒤 전선에 최대 병력으로 투입한 중간 책원지였다. 이러한 이유로 이 지대를 '철의 삼각(Iron Triangle)'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이 일대에서 수많은 크고 작은 전투가 일어났다. 그 중에서도 쌍방의 전체적인 작전과 전세에 많은 영향을 끼친 전투로는 파일드라이버 작전(Operation Piledriver), 백마고지 전투, 저격능선 전투 등이 있다.
1952년 10월
백마고지 전투
백마고지 전투(白馬高地戰鬪)는 6.25 전쟁 당시인 1952년 10월 6일 ~ 10월 15일까지 백마고지에서 한국군과 미군이 중국인민지원군과 싸워 승리한 전투이다.
1953년 2월 – 1953년 4월
잣골 전투
잣골 전투(영어: Battle of Chatkol)는 철의 삼각지대안에 위치한 철원군 근북면 근처에서 1953년 2월 26일부터 4월 21일까지 벨기에-룩셈부르크 대대와 중공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다.
1953년 3월 – 1953년 7월
폭찹힐 전투
폭찹힐 전투(Battle of Pork Chop Hill) 혹은 폭찹고지 전투는 유엔군과 중국군 및 북한군이 한국 군사 정전 협정을 협상하던 중인 1953년 4월 16일과 7월 6일에 각각 발생한 두 차례의 연관된 6.25 전쟁 보병 전투이다. 중국에서는 석현동 북방 전투(중국어: 石峴洞北山戰鬥)라 불렀다.
1953년 5월
제3차 후크고지 전투
제3차 후크고지 전투는 한국 전쟁 기간 중인 1953년 5월 28일부터 29일 사이에 미국, 영국, 튀르키예, 대한민국의 유엔군과 중공군이 판문점 인근의 '후크고지'에서 맞붙은 전투이다.
1953년 6월
해리 전초기지
해리 전초기지(영어: Outpost Harry)는 6.25 전쟁 당시 철의 삼각지대라고 불리는 한반도의 작은 언덕 꼭대기에 위치한 외딴 전초기지였다. 이 지역은 서울에서 북동쪽으로 약 100km 떨어져 있었으며, 휴전선 인근의 김화군과 철원군을 감제할 수 있는 고지였다. 중화인민공화국 측 사료에는 381동북방 무명고지(중국어: 381东北无名高地)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리스 한국 원정군 병사들은 그리스 신화의 저승의 신 하데스의 이름을 따 하데스 기지라고 부르기도 했다.
1953년 7월
사미천 전투
사미천 전투(영어: Battle of the Samichon River)는 1953년 7월 24일부터 7월 26일까지 벌어진 한국 전쟁의 마지막 전투다. 유엔 사령부의 오스트레일리아 및 미국 부대와 중국인민지원군은 제임스타운선의 요충지인 "후크고지"로 알려진 지역을 두고 여러 차례 싸운 적이 있었다. 전투 당시에 사미천 일대에는 오스트레일리아 왕립 연대 제2대대와 제28보병여단, 그리고 미국 제7해병여단이 주둔하고 있었고, 이들은 중국인민지원군 제137사단과 2차례의 야간 공격을 비롯한 수많은 전투를 치렀다. 중국인민지원군은 유엔군의 중포와 소화기 공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이 전투는 중국인민지원군이 미국 제1해병사단에 가한 사단급 공격의 일부였는데, 오스트레일리아군을 향한 공격이 특히 심했다. 판문점에서 평화 조약이 합의에 이르자, 중국인민지원군은 1분이라도 더 유엔군으로부터 승리를 쟁취해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고자 했으나, 유엔군은 정전 협정이 체결되기 직전 승리를 거두었다.
이 땅의 앞뒤 사건
- 1945년광복
- 1948년대한민국 정부 수립
- 1948년 – 1949년제주 4·3 사건
- 1950년 6월 – 1953년 7월6.25 전쟁이 페이지
- 1953년정전 협정
- 1960년4·19 혁명
- 1961년5·16 군사정변
이 땅을 다스린 나라
역사 국경 데이터(Cliopatria)에서 이곳이 속한 나라입니다. 연도는 데이터 간격(몇 년~100년)만큼 대략적입니다. 누르면 그해 지도로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