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7년
플라시 전투
플라시 전투는 영국 동인도 회사가 벵골 수바와 프랑스 동인도 회사를 상대로 거둔 결정적인 승리로, 1757년 6월 23일 발발했다. 7년 전쟁의 일환이었던 이 전투는 벵골 내에서 영국의 주도권을 확실시하게 되었고, 이후 100년간 인도 전체를 지배하는 기틀을 마련했다.
1756년 – 1763년
7년 전쟁(영어: Seven Years' War, 독일어: Siebenjähriger Krieg 지벤예리거 크리크[*], 1756년 ~ 1763년)은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에서 프로이센에게 패배해 독일 동부의 비옥한 슐레지엔을 빼앗긴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가 그곳을 되찾기 위해 프로이센과 벌인 전쟁을 말한다. 이 전쟁에는 유럽의 거의 모든 열강이 참여하게 되어 유럽뿐 아니라 그들의 식민지가 있던 아메리카와 인도에까지 퍼진 세계대전급의 대규모 전쟁이었다. 인도의 무굴 제국이 프랑스의 지지를 받으며, 영국에 의한 벵골 지방의 침공을 저지하려고 했다. 주로 오스트리아-프랑스-작센-스웨덴-러시아가 동맹을 맺어 프로이센-하노버-영국의 연합에 맞섰다.
1757년
플라시 전투는 영국 동인도 회사가 벵골 수바와 프랑스 동인도 회사를 상대로 거둔 결정적인 승리로, 1757년 6월 23일 발발했다. 7년 전쟁의 일환이었던 이 전투는 벵골 내에서 영국의 주도권을 확실시하게 되었고, 이후 100년간 인도 전체를 지배하는 기틀을 마련했다.
1757년
로스바흐 전투는 1757년 11월 5일 작센 선제후령(Electorate of Saxony)에 있는 로스바흐(Roßbach) 근교에서 벌어진 7년 전쟁(1756 - 1763)의 전투 중 하나이다.
1757년
콜린 전투는 1757년 6월 18일 벌어진 7년 전쟁의 전투 중 하나로 폰 다운 백작이 지휘하는 44,000명의 오스트리아군이 프리드리히 대왕이 지휘하는 32,000명의 프로이센군을 격파하였다. 프로이센군은 이 전투에서 패해 약 14,000명의 병력을 잃었고 오스트리아군은 약 9,000명의 병력을 잃었다.
1757년
로이텐 전투는 1757년 12월 5일 벌어진 전투로 프리드리히 대왕 휘하의 프로이센군은 교묘한 기동과 지형을 이용하여 수적으로 우위에 있던 카를 휘하의 오스트리아군을 결정적으로 패퇴시켰다. 이로 인해 프로이센은 7년 전쟁 중 슐레지엔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할 수 있었다.
1757년
프라하 전투는 스터보홀리 전투(Battle of Štěrboholy)라고도 하며, 1757년 5월 6일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프리드리히 대왕이 지휘하는 67,000명 군세는 60,000명의 오스트리아군을 퇴각시켰으나 프리드리히 대왕의 군세는 14,300명의 병력을 잃었고, 이 피해로 인해 프로이센군은 프라하를 공격할 전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1757년
윌리엄 헨리 요새 전투(Siege of Fort William Henry)는 프렌치 인디언 전쟁이 벌어지던 1757년 8월 루이조제프 드 몽칼름이 이끄는 프랑스군과 윌리엄 헨리 요새를 지키던 영국군 사이에 벌어진 프렌치 인디언 전쟁 중의 전투이다. 조지 호수 남쪽에 위치한 이 요새의 포위전에서 병력이 부족한 영국은 항복하고 요새를 철수하기로 했지만, 그 때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있던 인디언에 의해 영국군에 학살 행위가 일어났다. 이 행위에서의 사망자는 당초 1,500명 정도라고 알려져 있었지만, 현대의 조사는 200여명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1757년
그로스-야거스도르프 전투는 7년 전쟁의 전투 중 하나로 1757년 8월 30일 벌어졌다. 러시아의 스테판 페도로비치 아프라크신(Stepan Fedorovich Apraksin) 원수 휘하의 러시아군이 병력면에서 볼 때 규모가 작은 한스 폰 레발트(Hans von Lehwaldt)원수 휘하의 프로이센군을 격파하였다.
1756년
로보지츠 전투(독일어: Schlacht bei Lobositz)는 1756년 10월 1일 벌어진 전투로 육상전에서 7년 전쟁의 개막을 알린 첫 전투이다. 프리드리히 대왕이 지휘하는 약 29,000명의 프로이센군은 오스트리아의 야전사령관 막시밀리안 율리시즈 폰 브라운(Maximilian Ulysses von Browne)원수가 지휘하는 약 34,500명의 오스트리아군이 포위당한 동맹국 작센 공국의 군대를 구원하는 것을 저지했다. 이로 인해 작센은 2주 후에 항복하였다.
1757년
하스텐벡 전투는 1757년 7월 26일에 벌어진 전투로 하노버, 헤센-카셀, 브라운슈바이크 연합군이 하노버 선제후국에 있는 하멜른 근교에서 프랑스 군에게 패배하였다.
1756년
메노르카 해전(Battle of Menorca) 혹은 메노르카섬 해전(1756년 5월 20일)은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가 영국 함대를 격파한 전투로 이 전투로 인해 영국은 군법회의를 열었고, 결국 함대사령관을 사형시켰다. 이 전투는 7년 전쟁 중 유럽 전역의 시작을 알리는 싸움이었다. 전투 직전 영국은 부르봉 왕가에 대하여 전쟁을 선포했고, 양측의 함대는 지중해의 메노르카섬에서 격돌했다. 이 전투에서 영국은 패했고 이로 인해 군법회의가 개회되어 영국의 해군 제독 존 빙은 메노르카에 있는 영국 수비병들을 공성전에서 구원하는 데 "최선을 다하지 못한" 죄로 사형 당했다.
1757년
라이헨베르크 전투는 1757년 4월 21일 보헤미아의 라이헨베르크(현재 체코의 리베레츠)근교에서 벌어진 7년 전쟁의 전투 중 하나이다.
1757년
브레슬라우 전투는 7년 전쟁 중인 1757년 11월 22일 브레슬라우에서 프로이센군 28,000과 오스트리아군 84,000 이 맞붙은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프로이센은 6,000명을 잃고, 오스트리아는 5,000명을 잃었다. 그날 저녁 프로이센군이 퇴각함으로써 브레슬라우의 수비대는 방어할 수가 없어 오스트리아에 11월 25일 항복했다. 블레슬라우는 현재의 브로츠와프이며, 폴란드 실레지아에 있는 도시다.
1756년
피르나 공성전(Belagerung bei Pirna)은 7년 전쟁 중인 1756년 가을에 작센에서 벌어진 공성전이다. 프로이센군이 작센군을 포위를 하고 있었고, 오스트리아군이 구출을 시도했지만, 프로이센군이 승리를 거두며 작센군은 항복했다.
1756년
오스위고 요새 전투(Battle of Fort Oswego, 프랑스어: Bataille de Fort Oswego)는 프렌치 인디언 전쟁 때인 1756년 벌어진 영국군과 프랑스군 사이의 전투이다. 1756년 당시 프랑스는 행진을 계속하였고, 같은 해 8월에 벌어진 이 전투에서 루이 조제프 드 몽칼름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영국 군대의 요새인 오스위고 요새를 공략했다.
1756년
The Battle of Fort Bull was a French attack on the British-held Fort Bull on 27 March 1756, early in the French and Indian War. The fort was built to defend a portion of the waterway connecting Albany, New York to Lake Ontario via the Mohawk River.
1757년
The Siege of Prague was an unsuccessful attempt by a Prussian army led by Frederick the Great to capture the Bohemian city of Prague during the Third Silesian War. It took place in May 1757 immediately after the Battle of Prague. Despite having won that battle, Frederick had lost 14,300 dead, and his severely depleted force was not strong enough to assault Prague. Instead Frederick decided to besiege the city, hoping to force it into submission through lack of supplies. 40,000 Austrian troops were trapped in the city, though they were themselves not strong enough to consider launching a sortie. Frederick attempted to gain intelligence from within Prague by sending the criminal Christian Andreas Käsebier several times into the besieged city.
1757년
모이 전투는 1757년 9월 7일 7년 전쟁중에 벌어진 전투로 13,000명의 프로이센군이 두배나 되는 오스트리아군과 교전한 전투이다. 프로이센의 전군은 오스트리아군에 포위당해 결국 패했다. 전투는 현재 폴란드의 즈고젤레츠(Zgorzelec)인 북부 루사티아 괴를리츠(Görlitz) 근처에서 벌어졌다.
1756년
The siege of Fort St Philip, also known as the siege of Minorca, took place from 20 April to 29 June 1756 during the Seven Years' War. Ceded to Great Britain in 1714 by Spain following the War of the Spanish Succession, its capture by France threatened the British naval position in the Western Mediterranean and it was returned after the Treaty of Paris (1763).
1757년
로슈포르 습격(영어: Raid on Rochefort)은 7년 전쟁 중인 1757년 9월, 영국에 의한 프랑스의 로슈포르 항구 점령을 목적으로 한 상륙 작전이다. 습격은 몇 달 전에 취임한 윌리엄 피트가 세운 ‘프랑스 해안 급습’이라는 새로운 전략이 중심이었다.
1757년
The Battle of Cap-Français was a naval engagement during the Seven Years' War fought between squadrons of the French and British navies outside the harbour of Cap-Français, Saint-Domingue on 21 October 1757.
1756년
The siege of Calcutta was a battle between the Bengal Subah and the British East India Company on 20 June 1756. The Nawab of Bengal, Siraj ud-Daulah, aimed to seize Calcutta to punish the company for the unauthorised construction of fortifications at Fort William. Siraj ud-Daulah caught the Company unprepared and won a decisive victory.
1757년
The Battle of Chandannagar was a successful attack on the French Indies Company settlement of Chandernagore by a British force under the command of Robert Clive and Charles Watson on 23 March 1757 during the Seven Years' War and the Third Carnatic war. Chandernagore remained under military occupation by the British until the signing of the Treaty of Paris in 1763, which brought an end to the war.
1757년
The Battle of Sabbath Day Point took place on 23 July 1757 just off the shore of Sabbath Day Point, Lake George, New York and ended in a French victory. The battle, pitched approximately 450 French and allied Indian forces under the leadership of Ensign de Corbiere of the Troupes de la Marine against 350 New Jersey Blues under the command of Colonel John Parker. Ensign de Corbiere, aware of Parker's plan, ambushed and surrounded Parker's forces as they approached the shore in bateaux. In the ensuing rout Parker lost approximately 250 men with nearly 160 men killed or drowned and the rest taken prisoner. The French reported only one man slightly wounded.